1. 개요[편집]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3일에 걸쳐 울진·삼척 지구 연안을 통하여 북한측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 11월 4일 14시30분, 대간첩대책본부는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강원 정선·영월·삼척 지구에 을종사태[1]를 선포하고 군경과 예비군을 동원해 공비들의 퇴로를 차단, 포위망을 구축하고 본격적인 소탕작전에 돌입한 것을 일컫는다. 이 무장공비 침투 사건은 남한 사회에 주요하고 큰 영향(반공질서의 강화)을 끼치게 되었다.2. 발단[편집]왜 북한은 그토록 다수의 무장공비를 침투시켰는가? 북한은 이런 강력하고 무자비한 무력도발을 통하여 여러 가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이하의 항목은 그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빨치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행위 자체가 무지하게 의미 없는 짓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의 괴멸과정을 통해 남한 내에 친북 무장세력을 심는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교훈을 얻었을 텐데도 마치 일단 지르고 보자는 식의 무모한 짓이었다.북한 수뇌의 대남 인식북한 노동당의 총수 김일성은 68년 9월 9일, 북한 정권 창건 20주년 기념식에서 “남한 혁명은 주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며, 이 주권 쟁취 방법은 무력만이 있을 뿐”이라고 발언하였다. 이 발언은 68년 1월 초에 있었던 청와대 기습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고 난 이후의 발언이기 때문에 더욱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중국과 소련의 군사원조의 획득1968년 전후 미국은 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중지하는 동시에 파리평화협정을 진전시킴으로써 베트남 전쟁을 마무리해 가고 있었다. 동서 대결의 분위기가 완화되어 가던 추세 속에서 북한은 중공과 소련의 군사 원조를 지속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한반도의 긴장 상태를 다시 한 번 부각시키고자 했다.남한 체제의 혼란과 충격 기도60년대 말 70년대 초에 접어들면서 남한과 북한과의 경제 격차는 이제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경제 격차가 자꾸 벌어지게 되면 그들이 기도하는 '적화통일'은 사실상 요원한 일이 되기 때문에 이같은 사태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그들은 이 사건에서 경제 혼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위조지폐를 나누어주었다. 다소 고루한 설명일 수도 있겠으나 남한에서 반정부 민중 봉기를 일으킬 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침투하였다.김일성의 게릴라 병
위의 항목과 일부 중첩되긴 하지만, 북한의 김일성 자체가 게릴라로 사회주의 활동 경력을 시작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 김일성은 게릴라 투쟁만이 옳은 방식의 투쟁으로 여기고 통일의 제1방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2] 그래서 평화통일을 외치는 집단은 북한에서 일종의 요식을 위한 단체로만 남고, 실제로는 김일성의 빨치산 혁명전술로 인해 북한은 끊임없이 무장공비를 내려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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